정의(正義)를 위한 쾌남아(快男兒)

그는 1879년에 황해도 해주 동문 밖에서 출생하였는데 나이 열두살이던 1890년에 부친 태훈(泰勳) 또는 진해(鎭海)와 같이 신천군 두라면(信川郡 斗羅面)에 이주하여 그의 일가인 숙부 태현(泰賢). 태건(泰健). 태민(泰敏)과 함께 한 동리에서 살았다.

원래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군수를 지냈으며 또 부친도 진사의 벼슬을 하였으나 일체 관직에는 봉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중근의 나이 16세 되던 1894년에 전라도에서 학정의 쇄신을 부르짖는 동학농민의 의거가 발생하여 탐관오리를 살육하고 관아의 군고(軍庫) 및 양반부호의 집들을 파괴하여 외세의 배격을 부르짖자 잠시 동안에 그 세력은 전라도는 물론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 까지 파급되었다.

또한 그 여세가 북으로 번져 황해도 신천에까지 이르게 됨에 지방에서 수천석의 부호로 지내던 안중근의 부친은 자기 토지의 소작인을 중심으로 천여명의 동학진무군(東學鎭撫軍)을 편성하여 험준한 청계동 일대에 진을치고 난의 평정에 나서서 관군에 가담 협조함으로써 많은 토지와 재산을 지켰다. 이때 소년 안중근은 부친을 따라서 다년간 단련된 그의 용맹성과 놀라운 총술로 동학군을 해산하게 하여 인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간악한 일본의 정치적 침략행동에 대해서 수시로 듣고 그 때마다 소년 안중근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의협심이 남달리 강하여 불의에 대하여는 추호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안중근의 생애는 한말의 주체적 역량의 부족으로 국정이 극도로 혼란해져 국운을 겨우 부지하고 있던 시기로부터 시작되어 1910년의 실국(失國)의 비극을 보게 된 것과 함께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1875년 9월 운양호(雲揚號)사건이라는 교묘한 사건을 만들어 이것을 구실로 일찍부터 집요하게 침략근성을 내포한 수교를 요구하여 오던 일본은 그 다음해(1876) 2월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꾸준히 잠식적으로 침략과 약탈을 계속하여 오다가 동학란으로 인하여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하자 그들은 전면적으로 한국 침식의 준비를 갖추었었다. 그리하여 8월 20일에 일본공사 <오오도리. 大鳥圭介>와 외부 대신 김윤식(金允植) 사이에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 7개조가 조인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단순한 상품시장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지배의 야망이었던 것이다.

구국전선(救國戰線)의 선두(先頭)에 나서서

안중근은 26세 되던 해에 집안이 평남 삼화군 진남포(三和郡 鎭南浦)로 이사하게 되자 가까운 평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보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 및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 등에 의하여 정치사상을 함양하였으며 또 평양에 가서 항일지사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고무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외세의 터전이 된 비극의 풍토에서 일제를 비롯한 침략세력에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주먹을 불끈 쥐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은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05년 11월 10일에는 침략의 원흉 <이토오>가 다시 특파대사로 파견되어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의 조인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군대의 삼엄한 경계와 포위 속에 덕수궁에서 어전회의가 개최되고 국중내부의 친일주구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주동으로 하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기묘한 협조로 그 달 17일에 조인을 하게 되니 이로써 우리나라는 외교권마저 박탈당하고 그 대신 일제의 통치기관이 자리를 잡게 됨으로써, 나라의 주권은 완전히 상실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멸망된 것이며 그 후 1910년에 체결된 합병조약은 다만 형식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침략(侵略)의 원흉(元兇)을 쓰러뜨리고

1909년 10월 26일, 이 날은 소위 일본 제국의 추밀원 의장이며 공작인 <이토오>가 일찍이 한국에서 발휘하던 그의 솜씨를 구사하여 노일간의 여러 문제와 만몽(滿蒙)의 이권을 담판하여 청국침략의 길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으로 하르빈에 이르러 노국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는 날이다. <이토오>가 통과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각 역은 삼엄한 경계에 휩싸였고 더구나 하르빈의 경비상태는 철통 같았다.

이날의 환영 준비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관이어서 수천의 러시아 군대와 의장대, 외국사절단 및 일본 거류민단의 도열과 장중한 국악과 경축화포의 터지는 소리는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이 환영식의 환희가 <이토오>의 장례식이 되고 경쾌하던 음률이 장송곡으로 변할 줄은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외에는 지구상에 아무도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9시 10분 <이토오>를 태운 러시아 철도국의 총독 특별 열차가 플래트홈에 미끌어져 들어와 가벼운 반동과 함께 멈추자 채가구(蔡家溝)를 무사히 지나 <이토오>의 운명은 이제 불가피 안중근 자신의 손으로 결정짓게 되었다.

<이토오>는 기차가 정거해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코코프체프>와 차안에서 약 25분간 회담한 후 그와 나란히 러시아 북경 주차공사(駐箚公使) <코로스도에프>, 일본총영사 <가와카미.用上俊彦>. 만철이사<다나카.田中淸次郞>,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등에 호위되어 만족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는 의장대 앞을 지나 각국 영사관 직원들이 도열한 앞으로 가서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러시아 장교단의 앞으로 서서히 발을 옮겼다.

이때 장교단의 뒤에서 초조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안중근은 전광석화와 같이 뛰어 나가서 브라우닝 권총을 발사하여 3발을 <이토오>에게 명중시켰다. 이리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원로, 백발의 정객은 욕심 많은 흉계를 가슴에 간직한 채 <다 틀렸다(시맛다)>라는 한 마디를 최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역만리 하르빈역에서 힘없이 거꾸러졌다. 계속하여 <가와카미>총영사와 <다나카> 만철이사, <모리>비서관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니 환영장은 일순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러시아 병정이 안중근에게 달려들어 붙잡으니 그는 순순히 권총을 내어주고 <코리아 후라. 大韓萬歲>를 3창하면서 포박당하였다.

이때의 안중근의 눈에서는 눈물이 어리었으니 그것은 기쁨에 넘친 환희의 눈물이었다. 이윽고 한민족의 원수 <이토오>는  불의(不義)의 피를 흘리다가 약 25분후 완전히 지옥으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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